벌써 2016년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며 오늘 뭐 했나 싶은 허무함 속에 1년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그 먼지 같기만 하던 하루하루가 모여 365일이 되니 그동안 나름 성장해 있는 내 자신에게 대견한 마음이 듭니다.
‘더 나은 대안이 없다면 무책임하게 도와주려하지 마라.
그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그 문제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에게는 최선이기에.’
근래 들어 많이 고민하고 곱씹는 생각입니다.
예전에는 어떻게든 어떤 방법으로든 아픈 이들을 낫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허리가 아픈 분도, 무릎이 아픈 분도, 머리가 아픈 분도 말입니다. 게다가 마음공부하면서 부터는 우울한 분들도, 분노하는 분들도 그들의 헝클어진 마음을 정리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돕고자 하는 마음은 선한 것이기에 이런 나의 선의가 그분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러한 믿음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아픔을 덜어주는 것이 과연 그분들에게 최선일까? 그분들이 원하는 것일까? 그분들이 과연 그 결과를 기뻐할까?’
A라는 연세 지긋한 할머니가 계십니다.
그 할머니는 어깨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무릎도 아프십니다. 온 사방이 돌아가면서 아픕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독거생활하시는 이 할머니가 많이 외로워하신다는 걸, 사랑과 관심에 배고파하신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매번 아플 때마다 자식들에게 관심과 돌봄을 바라며 전화를 하셨다는 것도요. 이 할머니라면 건강하게 지내면서 자식들로부터 무관심해지는 게 더 나을 까요? 아니면 몸이 아프지만 덕분에 자식들의 관심을 받는 게 더 나을 까요? 만약 후자라면 이 할머니에게 건강해 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B라는 학생이 있습니다.
척추 측만증으로 허리가 많이 아프고, 공부에 집중하기도 힘듭니다. 건강해 지길 원하는 마음에 치료를 시작하였지만, 기대만큼 회복속도가 빠르지 않습니다. 나중에야 이 학생은 성적 때문에 어머니로부터 많은 비난과 질책을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잠깐의 침묵 후에 저는 학생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너라면 두 가지 경우 중에서 어떤 상황이 더 나을 것 같아? 멀쩡한 허리로 제대로 공부 했지만 성적이 별로여서 엄마에게 비난받는 거?, 아님 허리가 아파서 제대로 공부를 못 하는 바람에 성적이 엉망이지만, 엄마로부터 비난 대신 걱정의 말을 듣는 거?” 학생은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이 학생에게 다시 건강해 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C라는 젊은 여성분이 계십니다.
심한 만성 소화기계 질환으로 오랜 기간 고생해 오신 분이십니다. 수년간 이것저것 안 받아 본 치료가 없습니다. 그러나 병은 여전합니다. 이 분에게 물어보았습니다. “혹시 이렇게 아파서 좋은 점이 있을까요?” “음... 술주정하며 엄마를 괴롭히는 아빠를 멈추게 할 수 있어요. 아무도 아빠를 멈추게 할 수 없지만, 내가 아파서 데굴데굴 구르면 그땐 아빠는 얌전히 방으로 들어가요.” 이 분에게 건강해 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신체적 문제에 심리적인 목적과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을 심리학 용어로 "부가적 이득으로 인한 신체화 증상"이라 합니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심리적 의도라 함은 꾀병과 같은 의식적인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무의식적인 의도를 뜻합니다.)
부가적 이득으로 신체적 증상이 있는 경우에는 치유에 성공하는 경우들도,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습니다. 4년간의 경험을 통해 이러한 성공과 실패를 구분 짓는 것은 ‘질병을 대체할 만한 다른 좋은 대안이 있는가’의 여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A할머니는 아프지 않고서도 관심과 돌봄을 받을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이 있는지,
B학생은 아프지 않고서도 엄마의 비난과 질책을 피할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이 있는지,
C여성은 아프지 않고서도 술주정 하는 아빠를 제지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는지의
여부가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런 대책 없이 건강해 지면
A할머니는 외로움 속에 내동댕이쳐져야 하고,
B학생은 엄마의 비난과 질책으로 무능하고 못난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을 당해야만 하고,
C여성은 엄마가 아빠에게 괴롭힘 당하는 것에 속수무책이 되고 맙니다.
대안을 찾을 수 없다면, 그분들에게는 아픈 게 최선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무의식적인 의도도 헤아리지 못하고 억지로 건강해지도록 등 떠민다면, 과연 그것이 진정으로 그들을 도와주는 거라 할 수 있을까요? 마치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사람에게서 구명튜브(신체적 문제)를 빼앗아버리고 바다로 등 떠미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명튜브를 버리고 싶다면, 대신 다른 무언가를 주어야 합니다. 헤엄치는 방법을 익히게 하든지, 배를 주든지.
때로는 배려가 폭력이 되기도 합니다.
그 배려가 상대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을 경우엔.
누군가를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은 자비롭고 선한 마음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마음이 상대방을 더 힘들게 한다면 어쩌면 이 마음은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닌, 나의 욕심을 채우고자 하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선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자 하는 욕심,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심, 혹은 인정받고자 하는 욕심에서 말입니다.
‘더 나은 대안이 없다면 무책임하게 도와주려하지 마라.
그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그것이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에게는 최선이기에.’
오늘도 고민합니다. 과연 무엇이 최선인지.
'***치유사례들*** > 1.단상(斷想)'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상] 몸을 통해 마음을 치유할 수 있을까? (0) | 2016.07.06 |
---|---|
[단상] 사람 잡는 cranial rhythm과 어이없는 나의 실수 (0) | 2016.02.12 |
[단상] 몸과 마음 둘 중에서 어느 것이 통증과 질병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가? (0) | 2015.12.03 |
[단상] '고난'과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0) | 2015.10.21 |
[단상] 심리적 역전: 낫고자 하는 '의식'과 아프고자 하는 '무의식'의 대결 (0) | 2015.04.12 |